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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지리산펜션:지리산 암자



 지리산 암자

암자를 찾아 스님을 만나야만 법문을 들을 수 있는게 아니다. 낙엽 한 장, 바람 한 자락을 마주치고서도 자연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
정찬주 소설가

상 선 암

숲 속에는 나무들이 붉게 자해한 흔적이 또렷하다. 낙엽들이 늦가을 찬 바람결에 하염없이 뒹굴고 있다. 나무들은 지난 여름의 무성한 꿈이 헛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음이 아닐까. 불가에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낙엽이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비로소 부질없는 꿈을 버리고 근본을 찾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리라.

이 말은 나그네가 산길을 오르며 젖어 보는 생각의한 자락이다. 상선암(上禪庵)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지도 힘들지도 않다. 그래서 한가로이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볼 수 있다. 암자에 가서 스님을 만나야만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낙엽 한 장, 바람 한 자락을 마주치고서도 자연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왜 아직도 헛된 꿈에 취해 살고 있는가. 나는 왜 근본을 찾지 않고 방황하고 있는가. 자연의 미물들을 보고서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보게 되는데, 이때의 산길은 인생길과 다름없다. 힘들게 오르막길을 올랐으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은 공짜나 마찬가지고, 때로는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 때인가 공영 텔레비전 방송에서 한 젊은 미국인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스님이 된 사연을 방송한 적이 있는데, 우리에게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을 졸업한 그의 출가 동기와,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란 그의 불교적 관점이 새삼 신선하였고 그가 서구 문명의 한 상징으로 다가왔음이다.

바로 그가 수행하였던 곳이 상선암이고, 그의 법명은 현각(玄覺)이다. 그는 상선암에서 불교를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이해하게 된다. 나그네에게는 그가 한 말 중에서 잊히지 않는 구절이 하나 있다.

“한국 불교에는 할머니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를 사랑합니다.”

그렇다. ‘할머니 냄새’가 배어 있다는 감성의 표현이야말로 한국 불교를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거기에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굳이 들라면 아마도 할머니의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무슨 무슨 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할머니의 믿음보다 더 순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할머니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모든 기도가 다 자식과 손자손녀를 잘되게 해달라고 빌 뿐이다.

상선암에도 현각의 표현대로 할머니 냄새가 난다. 지리산 시암재 아래의 산자락에 남동향으로 자리한 상선암. 암자의 본래 모습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양철 지붕이 얹혀 있지만 그래도 할머니 신도들이 가끔씩 찾아와 시주를 하고 가는 모양이다.

나그네를 상선암까지 안내한 화엄사의 명완 스님 발 밑으로 한 무더기의 낙엽이 뒹굴고 있다. 어디 이 낙엽들뿐일까. 이 세상에 영원한 만남이란 없다. 언젠가는 다 흩어져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만남이란 더욱 간절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은 정녕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느티나무 아래 선 스님의 긴 그림자가 빠져 달아나는 시간처럼 더욱 고독하게 보인다.

<가는 길>

천은사에서 노고단 가는 길 중간, 상선암을 가리키는 이정표 앞에 승용차를 주차시켜 놓고 거기서부터 산길을 오르면 된다. 30분 정도 천천히 오르면 암자가 나타난다. 상선암은 천은사 산내암자이다.(☏천은사 종무소 0664-781-0045)

문수대

암자가 지리산 노고단 부근의 해발 1450여m쯤에 자리하고 있다니 지레 겁이 난다. 화엄사 구층암에서 1박하고 아침을 누룽지 죽으로 해결한 뒤, 신발 끈을 죄는데 왼쪽 신발의 끈이 뚝 끊어진다. 닳아서 낡기도 했지만 너무 힘을 주었던 것이다. 긴장을 하면 근육에 힘부터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겁을 가불해 내는 자신이 우습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산길을 오르면 그뿐이다.

화엄사를 출발한 시각은 오전 9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일찍 떠난 셈인데, 성삼재 가는 길은 그대로 주차장이다. 등산객과 관광객들을 태운 차들이 한 차선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는 것은 명완 스님의 재담 덕분이다.

명완 스님은 어제 상선암에 이어 또다시 안내를 자청했는데 문수대에서 수행하였던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를 섞어 해주었다.

“그때 전두환씨는 백담사로 가고, 나는 화엄사에서 직책을 내놓고 문수대로 갔습니다. 하하하. 문수대는 백담사보다 더 험한 곳이지요. 방 하나뿐인 토굴이니까요.”

문수대는 신라시대 원효 스님이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암자가 스러져 터만 전해지고 있다가 약 100년 전에 두 젊은 스님이 토굴을 짓고 수행하면서부터 문수대라고 불렸단다. 문수대라고 이름 붙여진 사연을 명완 스님은 통도사의 경봉 스님한테 들었다며 들려준다.

어느 날 두 스님은 원효 스님이 수행하였던 지리산 한 터에서 용맹정진하자고 약속하였단다. 마침 겨울철이어서 두 스님은 겨울을 날 정도의 식량을 서로 등에 지고 산에 올랐다. 눈이 내리면 산길이 끊어져 버리므로 식량을 조달하러 화엄사를 오르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스님은 잠을 자지 않고 화두를 붙들었다. 식사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참선 정진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머리는 산발하고 눈물 콧물 흘린 자국으로 얼굴이 지저분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 노인의 부탁인즉 두 스님과 같이 수행하자는 것. 처음에 두 스님은 거절하였다. 우선 먹을 식량이 두 사람 몫뿐이고, 방도 비좁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스님은 노인이 자꾸 부탁하니 난감하였다. 눈 쌓인 험한 산으로 노인을 내쫓는 것은 살생의 짓이나 마찬가지였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노인이 나무하고 밥해 준다고 하니 세 끼를 두 끼로 줄이면 될 것도 같아서였다.

결국 두 스님은 노인과 함께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스님이 졸면 노인이 나무막대기로 치고, 또 노인이 졸면 두 스님이 그의 등을 치며 졸음을 이겨 나갔다. 그렇게 한겨울이 지나갈 무렵, 노인이 두 스님을 불렀다. 그러더니 “수행 잘하시오”라고 한마디한 후, 옷 속에서 짧은 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지팡이는 푸른 사자로 변하였고, 노인은 사자의 등에 탄 뒤 남해 바다 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노인은 문수보살이 두 스님의 정진을 돕기 위해서 화현(化現)한 것입니다. 보살은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타나 뜻이 간절한 사람을 돕지요.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보다 조금 낫거나 천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노고단 산장을 지나 방송국 중계탑 문 우측으로 빠져나가니 바로 내리막 산길이고 좀더 가니 나뭇가지 사이로 문수대의 지붕이 보인다. 이 문수대 역시 6·25 전쟁의 와중에서 불타버리고 지금은 몽골인의 이동식 천막집인 겔(ger) 같은 모습이다.

방 한칸의 돌집 토굴이다. 수행승은 외출한 듯 없고, 작은 불상(佛像) 하나 보이지 않는다. 냉기가 싸늘한 좁은 방 한켠에는 이불이 잘 개어져 있다. 나그네는 돌아서려다 일행의 지갑을 서로 동의하에 털었다. 그리고는 한 사람에게 시켜 이불 속에 묻어두고 그곳을 떠났다. 불상이 없다고 어찌 부처님이 없다고 할 수 있으리. 돌집 토굴에서 공부하는 스님의 마음이야말로 지리산의 부처님이 아닐까.

지리산을 내려와 천은사 수홍루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나그네 마음도 노을 꽃다발처럼 어느새 붉어지는 기분이다.

<가는 길>

화엄사 뒤 산길로 노고단까지 가는 길로는 3시간 정도 걸리고, 승용차로 성삼재 주차장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걷는다면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노고단 산장을 지나 KBS 중계탑까지 50분, 다시 중계탑 우측에서 암자까지 30여 분 걸린다.(☏화엄사 종무소 0664-782-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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