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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지리산펜션:하동-칠불사




















*** 지리산 주변의 사찰들 - 칠불사



가락국의 원류인 김해지방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지리산에 가락국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왕산 기슭의 덕양전을 비롯한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양왕, 즉 구형왕에 관한 흔적과 화개골 깊숙이 자리잡은 칠불사가 그것이다.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칭호의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에 있어서 이 땅의 찬란한 불교문화와 지리산 음악의 원류이며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왕조의 숨결이 깃들여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 큰 사찰이다. 아자방(亞字房) 온돌, 김수로왕의 7왕자가 성불한 사찰, 서산대사 등 수많은 선사를 배출한 동방제일의 선원이란 등등의 칭호로 잘 알려진 지리산의 사찰이다. 우선 칠불사 지세와 위치는 지리산의 중봉격인 반야봉(般若峰)의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용틀임 해 40여리 뻗어내린 해발 830M에 자리잡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605번지에 해당한다. 험준한 산속 깊숙하게 자리잡은 칠불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역사가 자그마치 2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금 경의감을 감출 수가 없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법흥왕 15년, 서기 528년)한 후 16년만에 신라는 지리산에 화엄사와 연곡사를 입산시켰지만 가락국은 신라 눌지왕 36년, 서기 452년에 불교를 받아 들였으며 최소한 신라보다 1세기 앞서 지리산에 칠불사를 세워 입산시켰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사의 비사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는 가락국의 흥망이 베일과 가려진 채 오늘에 이르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칠불사의 창건설화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 7년, 신라 유리왕 25년, 중국후한 광무제 24년으로 거슬러 간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皇玉) 공주가 인도의 아유타왕국에서 東으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뒤 왕자 열 명과 두 공주를 낳는데 태자(太子)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차자 석(錫)왕자, 3자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왕후의 성을 이어 김해 許씨의 시조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이며 인도의 승려로 가락국에 함께 온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이라고도 함)를 따라 승려의 길을 걷는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보옥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수도생활을 하다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도에 들어갔다.

일곱 왕자와 보옥선사의 피나는 수도생활은 헛되지 않아 유난히 달밝은 어느 밤 일곱 왕자는 드디어 세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바로 칠불사 창건 설화이다. 이때가 수로왕 62년 신라는 파사왕 24년, 서기 103년 8월 보름이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의 부처로 탄생했다. 금왕 광불(光佛), 당불(幢佛), 상불(相佛), 행불(行佛), 향불(香佛), 성불(性佛), 공불(空佛)등 일곱 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를 찾아 지리산에 온다. 성불한 왕자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쉽게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칠불사 경내의 맑고 푸른 연못을 지켜보라 했는데 연못 속에는 일곱 왕자의 금빛 찬란한 모습이 비쳐졌다. 그 연못은 그림자가 비쳐진 연못이라 해 영지(影池)로 불린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가 수도하던 운상원 즉 칠불암이 칠불사로 불리게 됐다.

당시 수로왕이 머문 곳은 칠불사 아래의 범왕(梵旺). 왕비가 머물며 천비사(天비(女比)寺)를 세운 곳을 쌍계사 못 미쳐 있는 마을로 대비촌(大비(女比)村)이라 불렀으며 3정승이 기다리던 곳은 삼정(三政)으로 불렀다 한다. 일곱 왕자를 성불시킨 보옥선사, 즉 장유화상은 이땅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당시 어려움을 피해 쉽게 포기할지도 모를 왕자들을 깊은 산중으로 인도해 수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김해의 장유면이란 지명과 연관성이 깊다. 보옥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와 음악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지리산 범패음곡의 원류로도 보인다. 특히 운상원과 남원의 운봉 그리고 보옥선사와 옥보고의 음악이 지리산이 음악의 산실이었다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두고 볼 때 아직 명확한 규명은 되지 않고 있으나 지리산 음악의 원류임은 명백한 듯하다.


칠불사의 중요한 부분은 또한 세계건축대사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亞字房)을 빼놓을 수 없다.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우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이 방은 100명이 좌선할 수 있으며 건축이래 한번도 개수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신라 효공왕 때 김해에서 온 어느 선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써 청소를 하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불이 잘 지펴져 방주 위의 높은 곳부터 따뜻해져 그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서산대사는 수도를 한후 아자방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는데 막연히 신라적 절이라고 해 칠불사가 오랜 절임을 말하기도 했다.



칠불사의 아자방은 칠불사 창건 설화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면서 수많은 설화를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곱 왕자의 성불이 깃들인 칠불사는 그러나 1800년에 화재가 나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복구됐다. 칠불사는 또 그후 빨치산과 국군토벌대와의 교전이 치열한 와중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사 다시 불타는 아픔을 겪고 78년부터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락국의 신비와 우리나라의 불교문화 전래 과정과 지리산 음악, 천년 온돌 아자방과 아자방에서 득도한 수많은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전쟁의 아픔은 물론 우리 선조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 화개골과 칠불사는 영원토록 우리 민족과 함께 할 것이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지리산둘레길-구례:송정-오미구간
















[일상탈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오미 9.2㎞ 구간
"지리산 품은 둘레길 참 넉넉하구나"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이 열렸다. 새로 개통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오미를 잇는 9.2㎞ 구간 중 하늘에 닿을 듯 끝없이 올라가는 왕시루봉 능선 아래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공존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달 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 274㎞가 모두 이어졌단다. 2004년 도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지리산 순례길을 제안하고 2007년부터 둘레길 조성에 나선 지 5년여 만의 경사다. 지난해 5월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지리산 둘레길을 찾았다. 기왕이면 이번에 새로 개통한 구간을 걷기로 했다. 임현수 지리산 둘레길 구례센터장이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송정마을과 오미리 오미마을을 잇는 9.2㎞ 구간을 추천했다. 임 센터장, 또 지난해 둘레길에서 만났던 국립공원 자원활동가 최문옥 씨와 함께 따끈따끈한 '신상' 둘레길을 걸었다.


오전 10시 30분 무렵 송정마을에서 길을 나섰다. 시작하자마자 길은 산길로 이어져, 걷기는 뜻밖의 산행이 되었다. 그래도 천천히 걸으니 힘은 많이 들지 않는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을 모두 걸으려면 보름가량이 걸린다. 임 센터장은 "열흘 만에 다 걸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무엇을 봤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더라"고 말했다. 둘레길은 경쟁이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 걷기보다 잘 걷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화마가 할퀸 숯검정 속에도
희망의 새싹은 파릇파릇
족제비와 멧돼지 등등의 흔적들
이들이 지리산의 진정한 주인

둘레길은 관광지가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순례의 길
나아가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가르치는 지혜의 체험길 아닐까


숲길을 걷다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했다. 화마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11년 1월 31일자 신문 기사는 '30일 발생한 전남 구례의 지리산 왕시루봉 자락에서 발생한 산불이 임야 25㏊를 태우고 이틀 만에 진화됐다'고 전하고 있다. 나무를 만지자 지금도 숯검정이 묻어 나온다.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기사는 화재 원인을 등산객의 실화로 추정하고 있었다. 둘레길이 완전히 열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어쩌나….

소나무 그루터기 주변에서 새순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도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산불이 난 뒤에는 생명력이 강한 고사리가 가장 먼저 올라온다. 그래서 이 일대는 고사리 천지다. 지리산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중이었다. 베어진 소나무 그루터기 주변에서 소나무 새순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 새순이 언젠가 낙락장송이 된다니.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셋이 걸어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다. 최 씨는 이름을 모르는 나무나 꽃이 없다. 최 씨와의 걷기는 숲 해설을 듣는 즐거움이 있다. 서어나무는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근육남'이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들이 서로 붙는다. 그래서 자귀나무가 옆에 있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단다. 호리낭창한 대나무 종류인 '이대'는 옛날에는 화살로 사용했다. 낚싯대로 쓰기에도 좋겠다. 감태나무는 지팡이 하기에 좋다. '말발도리'는 왜 좋은 곳 놔두고 꼭 척박한 바위틈에서만 자라는지 모르겠다.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있는 '며느리밑씻개'. 얼마나 며느리가 보기 싫었으면 가시가 나 있는 풀을 보고 며느리 밑이나 닦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참 고된 시집살이였겠다.

지리산 숲의 진정한 주인은 실은 따로 있었다. 길에는 땅이 우둘투둘 팬 곳도 있다. 좀 전에 두더지가 지나간 흔적이란다. 족제비의 배설물도 발견했다. 배설물로 볼 때 녀석은 오디나 곤충은 물론 새까지 잡아먹었다. 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멧돼지의 진흙 목욕터를 찾았다. 멧돼지는 진흙 목욕 후 부근의 나무를 정해 두고 몸을 비벼 기생충을 털거나 가려움을 해소한단다. 베개목에는 멧돼지의 체취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멧돼지가 좀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에는 몇㎞가 남았다는 표시가 없다.
개울가에서 준비해 간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물이 마르지 않는 곳, 지리산. 여기 개울물은 마음 놓고 마셔도 된다. 아직은 개울에 물이 많지 않지만 여름에 비가 내렸다 하면 못 지나갈 정도로 금방 불어난단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에 몇㎞가 남았다는 표지가 왜 없는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임 센터장은 "지리산 둘레길은 관광지가 아니라 불편한 순례길이다. 스스로 느끼고 재보라는 뜻이다"고 말한다. 하긴 편리함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철조망에 파인 나무를 보고는 마음이 아파진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시작되며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참 좋다. 이 좋은 숲이 화재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좋던 마음은 철조망에 감겨 살점이 파인 나무를 보고 다시 불편해졌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데. 저걸 어떻게 해야할까.

오미마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정신이 번쩍 드는 길이 나타났다. 왕시루봉 능선 아래쪽으로 오르는 길은 엄청난 급경사를 자랑한다. 놀라서 입이 벌어진다. "설마 여기를 걸어서 오르라는 거야?" 4륜 구동 SUV도 포기했다는 길을 두 발로 오른다. 멀리서 보니 마치 하늘로 오르는 것 같다. 이번 둘레길의 하이라이트. 이 길이 명물이 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고개에 다 오르니 탁 트여 시원하기 그지없다. 발 아래로 토지면의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오미마을에 도착할 무렵 검은등뻐꾸기가 울어 젖힌다. 일명 '홀딱뻐꾸기'라고 부른단다. 우는 소리가 '홀딱벗고'라고 들려서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이거 참 미치겠다. 길가에는 산딸기와 오디가 심심찮게 나타나 걷기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오후 4시 20분께 걷기를 마쳤다. 오미마을 입구 오미슈퍼 평상에 걸터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참 시원하다.



운조루의 뒤주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길은 만들고 나서도 계속해서 정비를 해야 한다. 이 구간은 이정표도 부족해 간혹 길이 헷갈리기도 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돌을 빼내 길에 박는 바람에 꼭 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은 좀 아쉬웠다. 길이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보인다. 길쪽으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만 보면 조심스럽게 길 밖으로 돌려놓는 동행들의 모습에서 참 많이 느꼈다.

오미마을에서는 남한의 3대 길지 중 한 곳으로 알려진 아흔아홉 칸 한옥 운조루(雲鳥樓)를 만났다. 운조루의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적혀 있다.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란다. 운조루가 질곡의 현대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집에 내려오는 나눔의 정신 덕분이었다. 어느 때보다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이지만 나눔의 정신은 그때만 못한 것 같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공생의 길'을 둘레길에서 배웠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TIP

지리산 둘레길은 일반 산행과는 달리 보통 원점 회귀를 하지 않는다. 자가운전을 하면 다시 차량을 가지러 출발점으로 가야 하는 불편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쪽이 편리하다.

송정~오미 구간 예상 소요시간은 5시간 30분. 난이도 중. 구례버스터미널(061-780-2730~1)에서 송정까지 오전 6시 40분~오후 7시 40분 1시간 간격 배차, 15분 소요. 구례에서 오미까지는 오전 6시 40분~오후 6시 30분 2시간 간격 배차, 20분 소요.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지리산펜션:지리산등산로-국골

















지리산 국골//지리산 등산로

국 골

국골은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애환이 깃들여 있는 지리산의 숨은 계곡이다. 그리고 이웃한 칠선계곡의 선녀탕에 얽힌 사연과 함께 곰들이 쫓겨 들어와 살았던 골짜기이기도 하다.
국(國)골. 지리산의 많고 많은 계곡과 봉우리들 가운데 나라를 의미하는 뜻의 國골. 지리산의 많고 많은 계곡과 봉우리들 가운데 나라를 의미하는 뜻의 "國"자를 쓰는 지명은 이곳밖에 없다. 가락국의 10대 임금이며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군마를 이끌고 훈련을 시켰다는 말에 근거를 두고 붙인 지명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아직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평화롭게 넘겨주었다고 해서 양왕(讓王)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를 때 그러하다. 그러나 지리산 사람들은 구형왕이 나라를 넘겼다고 해서 양왕이라 하지만 국골과 추성산성을 근거지로 해 신라에 항거하다 다시 인근의 왕등재 일대에서 토성을 쌓고 저항하다 끝내는 왕산으로 쫓겨가 최후를 맞았다는 등의 구전을 들어 구형왕과 지리산을 애써 결부시키고 연관지으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가락국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가 유난히 많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추성산성터 주변의 두지터(식량저장고), 얼음터에서 국골은 물론이고 구형왕이 올랐다는 왕등재 그리고 왕등재 일대의 토성, 산청군 금서면의 왕산과 구형왕릉, 덕양전 또한 구형왕의 증손자였다는 김유신 장군의 훈련터 등이 그것이다.
개국 과정에서부터 베일에 가려져 아직도 정확하게 사료가 정립되지 못 하고 있는 가락국의 실체가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행적까지 송두리째 뒤덮여 있어 신비감을 더 갖게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구형왕이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국골을 천연 요새로 해 추성산성을 쌓아 도성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등재 일원에서도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하려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지리산 사람들은 하봉과 중봉사이를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나라의 뜻을 인용, 국골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들이 물론 오랜 세월을 보내 오면서 과장될 수도 왜곡될 수도 미화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리산이 이미 1천5백 여년 전부터 우리 민족사와 함께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새삼 지리산과 한민족의 깊은 인연을 되새기게 한다.
이즈음에서 국골 주변의 산성과 왕등재 일원의 토성, 그리고 왕산 일대의 유적들에 대한 학계의 발굴 노력을 통해 가락국의 패망과 신라와의 관계 등의 역사를 규명해 봄직하다는 생각이다. 국골은 가락국 마지막 왕의 피란 도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과 함께 태고적 선녀들의 노여움을 산 곰들이 칠선계곡에서 쫓겨 들어왔다는 동화같은 얘기도 전해 온다. 앞서 칠선계곡 편에서 언급했듯이 국골 너머 칠선계곡의 선녀탕과 그 전설의 궤를 같이한다.
일곱 선녀가 칠선계곡 선녀탕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던 것을 본 지리산 곰이 평소 연정을 품고 있던 중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 헤매도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사향노루가 이 사실을 보고 자신의 뿔에 걸려 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긴다는 게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 알고 옷을 숨긴 것이다. 그리하여 선녀들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는 칠선계곡으로 집단 이주해 살게 하고 몹쓸 짓을 한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는 얘기다.
국골은 선녀들이 곰을 내쫓았지만 그렇게 작지도 빈약하지도 않은 계곡이다. 칠선계곡의 지류에 해당하는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서 형성돼 추성동의 용소에서 칠선계곡과 합류한다. 마찬가지로 큰 계곡의 그늘에 가려 아직도 숨겨진 골짜기나 다름없다. 칠선계곡과 얼음골과 함께 추성동에서 오를 수 있는 세 개의 골짜기 중 가운데 위치해 있다.
하봉 능선을 사이에 두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은 지금은 등산로가 비교적 잘 이어져 있어 간혹 하봉 능선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찾는 깨끗하고 한적한 계곡이다. 당장에라도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들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구형왕이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들어왔듯 지리산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국골의 인상이다. 국골 산행은 한적한 분위기와 더없이 깊은 골짜기 특유의 원시림 속에서 표출되는 상쾌함, 그리고 태산장곡만이 자랑하는 스산함 등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산행의 시발점을 추성동으로 할 때 하봉 언저리의 하봉 능선과 교차 지점에서 하산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다가 다시 칠선골을 통해 추성동으로 하산할 수 있다. 이 코스는 상당한 체력소모를 요하므로 신중한 산행 준비가 필요하다.
국골 산행은 천왕봉을 오르기보다는 오히려 하봉을 오른 뒤 쑥밭재를 거쳐 왕등재를 거쳐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로 하산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코스는 특히 국골과 왕등재가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 즉 구형왕과 가락국의 사연들을 인식하며 답사해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이 구간은 지리산 동부권역 가운데 가장 덜 개방돼 인적이 드문데다 산세는 그 어느 곳 못지 않게 수려한 특성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해 등반의 묘미를 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구간 중 쑥밭재에는 일제 당시 지리산 일원에서 일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의 묘가 있는가 하면 빨치산과 국군의 양민학살 현장이 있기도 해 지리산 근대사의 실상을 체험해 볼 수도 있다.
국골 산행은 추성동 마을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농로가 시발점이 된다. 마을 뒷산, 칠선계곡과 합류지점인 용소 바로 위에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노송과 거목들이 운치있게 서 있어 본격 산행에 앞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에 적격이다. 초반부에는 계곡과 다소 거리를 두고 등산로가 나 있으나 10여분만 오르면 계곡과 함께 등산로가 있어 부담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2시간 남짓 오르면서 국골 산행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세련되지 못한 계곡미와 울창하면서도 덤불이 뒤엉켜 다소 무질서한 분위기는 음산함마저 일게 한다. 멀리 정상을 올려다보려 해도 수림으로 뒤덮여 중봉과 하봉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2시간여 동안의 산행을 하다 보면 계곡은 다시 하봉과 두류봉 사이의 골과 하봉과 중봉 사이의 골로 나뉘는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더이상 물줄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골 산행의 마지막 고비가 남은 셈이다. 깎아지른 듯한 등산로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요구한다. 길은 비교적 잘 나있는 편이지만 곳곳에서 길이 희미해지나 별다른 문제는 없다. 한시간 또는 한시간 30분 가량의 힘든 산행을 해야만 하봉능선에 도착할 수 있다. 얼음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는 곳이다. 마지막 구간의 급경사면은 돌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 주의해야 하며 겨울철 산행은 지극히 위험한 구간이 된다. 국골 산행은 일단 하봉능선에 도착하면서 끝이 난다. 여기서 하봉 정상으로 올라가 밭 아래 국골 전경을 뒤돌아 보는 것 역시 운치있다. 국골은 오르는데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해 주로 이 골을 찾는 등산객들은 얼음골 등 다른 코스로 하봉에 올랐다가 국골을 하산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어떤 코스를 선택하든 국골은 지리산의 숨은 골짜기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애환이 얽힌 사연까지 되새기며 산행을 한다면 더더욱 멋진 가을 산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