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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4일 목요일

지리산펜션:하동-고소산성






고소산성

먼 옛날 삼국시대의 아픈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고소산성(姑蘇山城)은 정확한 축조시기 등에 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천연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는 만큼 1000여 년 전 삼국시대 당시 이 요충지를 중심으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지난 66년 사적 제151호로 지정된 고소산성은 하동에서 화개장터로 향하는 국도 19번을 따라 차편으로 20여분 거리로 지리산의 여맥이 형제봉에서 흘러 섬진강으로 떨어지기 직전 해발 300m에 위치해 있다.
동북으로 지리산 준령을 등지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섬진강과 동정호(洞庭湖)를 발아래 둔 천혜의 요새다.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통로의 목을 쥐고 있는 셈이다. 이 일대가 지금은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정확한 경계선은 화개장터를 조금 지나 불무장등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다)이듯 삼국시대 당시는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역이었다 한다.
삼국시대 당시 요충지임에 틀림없는 이곳에 성이 축조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이치다. 산성 둘레는 800여m. 장방형(長方形)바위를 견고하게 쌓아올린 석성(石城)이다. 남북 양쪽에 성문을 설치했으며 성벽 높이는 3.5∼4.5m로 아래폭이 6m, 상면폭이 2m인 사다리 모양이다. 성의 축조 유래는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하동군지에 따르면 신라의 김춘추 장군이 백제를 공격할 목적으로 당나라에 원병을 청해 축조, 나당연합군의 주둔기지로 활용하면서 백제와 왜(倭)의 협력을 차단시켰다고 전한다. 특히 이곳에서 소정방(蘇定方)군이 주둔, 주력부대를 지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당시 나당연합군과 주력부대가 금강을 침공할 때 소정방이 군을 지휘했던 점과 악양 일대의 지명이 중국의 그것과 흡사해 산성이름에 소정방을 끌어들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신빙성이 덜하다는 주장이 있다. 오히려 신라가 백제와 왜(倭)와의 협력을 차단할 목적으로 그 이전에 산성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무튼 고소산성은 신라인에 의해 백제를 견제 또는 침공할 목적으로 축조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 고소산성의 축조 유래는 소송이(蘇松伊)에 얽힌 전설도 전해져 오고 있다. 蘇장군의 부친과 모친 경주 김씨는 후손이 없어 걱정을 하던 중 어느 날 김씨 꿈에 신령이 나타나 康州(지금의 진주) 부근으로 이사를 하면 후손을 볼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했더니 아들을 얻었다 한다. 그후 蘇장군이 성장, 외성(外城)을 쌓으라는 어머니 金씨의 명에 따라 산성을 축조했는데 蘇장군의 성씨를 따 고소산성이라 부른다는 전설이다.
형제봉 기슭의 고소산성에 얽힌 역사의 애환과 설화 못지않게 형제봉 주변에서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비옥한 대지인 평사리 들녘을 주무대로 한 소설 토지의 배경이 서려있음을 음미해 볼 수 있어 찾는 이들을 더욱 흥미롭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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