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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지리산펜션:하동-칠불사




















*** 지리산 주변의 사찰들 - 칠불사



가락국의 원류인 김해지방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지리산에 가락국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왕산 기슭의 덕양전을 비롯한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양왕, 즉 구형왕에 관한 흔적과 화개골 깊숙이 자리잡은 칠불사가 그것이다.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칭호의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에 있어서 이 땅의 찬란한 불교문화와 지리산 음악의 원류이며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왕조의 숨결이 깃들여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 큰 사찰이다. 아자방(亞字房) 온돌, 김수로왕의 7왕자가 성불한 사찰, 서산대사 등 수많은 선사를 배출한 동방제일의 선원이란 등등의 칭호로 잘 알려진 지리산의 사찰이다. 우선 칠불사 지세와 위치는 지리산의 중봉격인 반야봉(般若峰)의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용틀임 해 40여리 뻗어내린 해발 830M에 자리잡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605번지에 해당한다. 험준한 산속 깊숙하게 자리잡은 칠불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역사가 자그마치 2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금 경의감을 감출 수가 없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법흥왕 15년, 서기 528년)한 후 16년만에 신라는 지리산에 화엄사와 연곡사를 입산시켰지만 가락국은 신라 눌지왕 36년, 서기 452년에 불교를 받아 들였으며 최소한 신라보다 1세기 앞서 지리산에 칠불사를 세워 입산시켰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사의 비사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는 가락국의 흥망이 베일과 가려진 채 오늘에 이르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칠불사의 창건설화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 7년, 신라 유리왕 25년, 중국후한 광무제 24년으로 거슬러 간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皇玉) 공주가 인도의 아유타왕국에서 東으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뒤 왕자 열 명과 두 공주를 낳는데 태자(太子)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차자 석(錫)왕자, 3자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왕후의 성을 이어 김해 許씨의 시조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이며 인도의 승려로 가락국에 함께 온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이라고도 함)를 따라 승려의 길을 걷는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보옥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수도생활을 하다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도에 들어갔다.

일곱 왕자와 보옥선사의 피나는 수도생활은 헛되지 않아 유난히 달밝은 어느 밤 일곱 왕자는 드디어 세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바로 칠불사 창건 설화이다. 이때가 수로왕 62년 신라는 파사왕 24년, 서기 103년 8월 보름이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의 부처로 탄생했다. 금왕 광불(光佛), 당불(幢佛), 상불(相佛), 행불(行佛), 향불(香佛), 성불(性佛), 공불(空佛)등 일곱 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를 찾아 지리산에 온다. 성불한 왕자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쉽게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칠불사 경내의 맑고 푸른 연못을 지켜보라 했는데 연못 속에는 일곱 왕자의 금빛 찬란한 모습이 비쳐졌다. 그 연못은 그림자가 비쳐진 연못이라 해 영지(影池)로 불린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가 수도하던 운상원 즉 칠불암이 칠불사로 불리게 됐다.

당시 수로왕이 머문 곳은 칠불사 아래의 범왕(梵旺). 왕비가 머물며 천비사(天비(女比)寺)를 세운 곳을 쌍계사 못 미쳐 있는 마을로 대비촌(大비(女比)村)이라 불렀으며 3정승이 기다리던 곳은 삼정(三政)으로 불렀다 한다. 일곱 왕자를 성불시킨 보옥선사, 즉 장유화상은 이땅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당시 어려움을 피해 쉽게 포기할지도 모를 왕자들을 깊은 산중으로 인도해 수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김해의 장유면이란 지명과 연관성이 깊다. 보옥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와 음악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지리산 범패음곡의 원류로도 보인다. 특히 운상원과 남원의 운봉 그리고 보옥선사와 옥보고의 음악이 지리산이 음악의 산실이었다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두고 볼 때 아직 명확한 규명은 되지 않고 있으나 지리산 음악의 원류임은 명백한 듯하다.


칠불사의 중요한 부분은 또한 세계건축대사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亞字房)을 빼놓을 수 없다.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우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이 방은 100명이 좌선할 수 있으며 건축이래 한번도 개수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신라 효공왕 때 김해에서 온 어느 선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써 청소를 하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불이 잘 지펴져 방주 위의 높은 곳부터 따뜻해져 그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서산대사는 수도를 한후 아자방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는데 막연히 신라적 절이라고 해 칠불사가 오랜 절임을 말하기도 했다.



칠불사의 아자방은 칠불사 창건 설화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면서 수많은 설화를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곱 왕자의 성불이 깃들인 칠불사는 그러나 1800년에 화재가 나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복구됐다. 칠불사는 또 그후 빨치산과 국군토벌대와의 교전이 치열한 와중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사 다시 불타는 아픔을 겪고 78년부터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락국의 신비와 우리나라의 불교문화 전래 과정과 지리산 음악, 천년 온돌 아자방과 아자방에서 득도한 수많은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전쟁의 아픔은 물론 우리 선조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 화개골과 칠불사는 영원토록 우리 민족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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