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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9일 화요일

지리산둘레길-구례:송정-오미구간
















[일상탈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오미 9.2㎞ 구간
"지리산 품은 둘레길 참 넉넉하구나"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이 열렸다. 새로 개통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오미를 잇는 9.2㎞ 구간 중 하늘에 닿을 듯 끝없이 올라가는 왕시루봉 능선 아래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공존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달 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 274㎞가 모두 이어졌단다. 2004년 도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지리산 순례길을 제안하고 2007년부터 둘레길 조성에 나선 지 5년여 만의 경사다. 지난해 5월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지리산 둘레길을 찾았다. 기왕이면 이번에 새로 개통한 구간을 걷기로 했다. 임현수 지리산 둘레길 구례센터장이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송정마을과 오미리 오미마을을 잇는 9.2㎞ 구간을 추천했다. 임 센터장, 또 지난해 둘레길에서 만났던 국립공원 자원활동가 최문옥 씨와 함께 따끈따끈한 '신상' 둘레길을 걸었다.


오전 10시 30분 무렵 송정마을에서 길을 나섰다. 시작하자마자 길은 산길로 이어져, 걷기는 뜻밖의 산행이 되었다. 그래도 천천히 걸으니 힘은 많이 들지 않는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을 모두 걸으려면 보름가량이 걸린다. 임 센터장은 "열흘 만에 다 걸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무엇을 봤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더라"고 말했다. 둘레길은 경쟁이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 걷기보다 잘 걷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화마가 할퀸 숯검정 속에도
희망의 새싹은 파릇파릇
족제비와 멧돼지 등등의 흔적들
이들이 지리산의 진정한 주인

둘레길은 관광지가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순례의 길
나아가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가르치는 지혜의 체험길 아닐까


숲길을 걷다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했다. 화마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11년 1월 31일자 신문 기사는 '30일 발생한 전남 구례의 지리산 왕시루봉 자락에서 발생한 산불이 임야 25㏊를 태우고 이틀 만에 진화됐다'고 전하고 있다. 나무를 만지자 지금도 숯검정이 묻어 나온다.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기사는 화재 원인을 등산객의 실화로 추정하고 있었다. 둘레길이 완전히 열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어쩌나….

소나무 그루터기 주변에서 새순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도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산불이 난 뒤에는 생명력이 강한 고사리가 가장 먼저 올라온다. 그래서 이 일대는 고사리 천지다. 지리산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중이었다. 베어진 소나무 그루터기 주변에서 소나무 새순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 새순이 언젠가 낙락장송이 된다니.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셋이 걸어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다. 최 씨는 이름을 모르는 나무나 꽃이 없다. 최 씨와의 걷기는 숲 해설을 듣는 즐거움이 있다. 서어나무는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근육남'이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들이 서로 붙는다. 그래서 자귀나무가 옆에 있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단다. 호리낭창한 대나무 종류인 '이대'는 옛날에는 화살로 사용했다. 낚싯대로 쓰기에도 좋겠다. 감태나무는 지팡이 하기에 좋다. '말발도리'는 왜 좋은 곳 놔두고 꼭 척박한 바위틈에서만 자라는지 모르겠다.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있는 '며느리밑씻개'. 얼마나 며느리가 보기 싫었으면 가시가 나 있는 풀을 보고 며느리 밑이나 닦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참 고된 시집살이였겠다.

지리산 숲의 진정한 주인은 실은 따로 있었다. 길에는 땅이 우둘투둘 팬 곳도 있다. 좀 전에 두더지가 지나간 흔적이란다. 족제비의 배설물도 발견했다. 배설물로 볼 때 녀석은 오디나 곤충은 물론 새까지 잡아먹었다. 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멧돼지의 진흙 목욕터를 찾았다. 멧돼지는 진흙 목욕 후 부근의 나무를 정해 두고 몸을 비벼 기생충을 털거나 가려움을 해소한단다. 베개목에는 멧돼지의 체취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멧돼지가 좀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에는 몇㎞가 남았다는 표시가 없다.
개울가에서 준비해 간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물이 마르지 않는 곳, 지리산. 여기 개울물은 마음 놓고 마셔도 된다. 아직은 개울에 물이 많지 않지만 여름에 비가 내렸다 하면 못 지나갈 정도로 금방 불어난단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에 몇㎞가 남았다는 표지가 왜 없는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임 센터장은 "지리산 둘레길은 관광지가 아니라 불편한 순례길이다. 스스로 느끼고 재보라는 뜻이다"고 말한다. 하긴 편리함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철조망에 파인 나무를 보고는 마음이 아파진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시작되며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참 좋다. 이 좋은 숲이 화재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좋던 마음은 철조망에 감겨 살점이 파인 나무를 보고 다시 불편해졌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데. 저걸 어떻게 해야할까.

오미마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정신이 번쩍 드는 길이 나타났다. 왕시루봉 능선 아래쪽으로 오르는 길은 엄청난 급경사를 자랑한다. 놀라서 입이 벌어진다. "설마 여기를 걸어서 오르라는 거야?" 4륜 구동 SUV도 포기했다는 길을 두 발로 오른다. 멀리서 보니 마치 하늘로 오르는 것 같다. 이번 둘레길의 하이라이트. 이 길이 명물이 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고개에 다 오르니 탁 트여 시원하기 그지없다. 발 아래로 토지면의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오미마을에 도착할 무렵 검은등뻐꾸기가 울어 젖힌다. 일명 '홀딱뻐꾸기'라고 부른단다. 우는 소리가 '홀딱벗고'라고 들려서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이거 참 미치겠다. 길가에는 산딸기와 오디가 심심찮게 나타나 걷기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오후 4시 20분께 걷기를 마쳤다. 오미마을 입구 오미슈퍼 평상에 걸터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참 시원하다.



운조루의 뒤주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길은 만들고 나서도 계속해서 정비를 해야 한다. 이 구간은 이정표도 부족해 간혹 길이 헷갈리기도 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돌을 빼내 길에 박는 바람에 꼭 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은 좀 아쉬웠다. 길이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보인다. 길쪽으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만 보면 조심스럽게 길 밖으로 돌려놓는 동행들의 모습에서 참 많이 느꼈다.

오미마을에서는 남한의 3대 길지 중 한 곳으로 알려진 아흔아홉 칸 한옥 운조루(雲鳥樓)를 만났다. 운조루의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적혀 있다.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란다. 운조루가 질곡의 현대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집에 내려오는 나눔의 정신 덕분이었다. 어느 때보다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이지만 나눔의 정신은 그때만 못한 것 같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공생의 길'을 둘레길에서 배웠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TIP

지리산 둘레길은 일반 산행과는 달리 보통 원점 회귀를 하지 않는다. 자가운전을 하면 다시 차량을 가지러 출발점으로 가야 하는 불편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쪽이 편리하다.

송정~오미 구간 예상 소요시간은 5시간 30분. 난이도 중. 구례버스터미널(061-780-2730~1)에서 송정까지 오전 6시 40분~오후 7시 40분 1시간 간격 배차, 15분 소요. 구례에서 오미까지는 오전 6시 40분~오후 6시 30분 2시간 간격 배차, 2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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