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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0일 일요일

지리산펜션:임실-원동산의견비

















임실 오수의 개, 장화신은 고양이, 콩쥐팥쥐, 흥부와 놀부, 은혜 갚은 꿩, 미운 오리 새끼(미운 아기 오리)와 같은 동화에 나오는 개, 고양이, 두꺼비, 제비, 꿩, 오리 등 동물과 새들은 우리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주인을 위래 목숨을 바친 개에 관한 의견설화(義犬說話, 의구전설)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어느 정도 사실에 바탕을 둔 것도 있다. 또 독자적인 기원에 의한 것과 다른 민족 사이에 전파된 것도 있다. 그 유형으로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을 포함, 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방독구주형(防毒救主型, 독약이나 독이 든 물이나 물건을 주인이 먹거나 만지려고 할 때 이를 막아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명당점지형(明堂點指型, 개가 죽으면서 발복할 명당을 찾아 준다는 유형) 등이 있다.

의견설화의 대표격은 진화구주형형으로, ‘오수형(獒樹型, 임실군 오수면 등)’으로, 주인이 잠든 풀밭에 불이 나자 개가 몸에 물을 적셔서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내용이다.

전북 도내엔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의 오수나무와 의견(비)을 비롯,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개비석, 김제시 김제읍 순동리의 의견비와 개방죽(현재 개방죽은 매립), 정읍시 신태인읍 양괴리 산정마을의 개 무덤과 방죽, 정읍시 북면 구룡리 신기마을 매개내의 의오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개비골의 개비석 등 6곳이나 존재하며, 다른 지방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결국, 이들 의견설화는 개가 인간적인 인격의 차원에 도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지.덕.체와 강유(剛柔)를 겸한 순박하고 정이 많은 평범한 전북인의 인간상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오수의 개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그 명성만큼이나 별칭도 많다. 예컨대 충견(忠犬), 의견(義犬), 보은(報恩)의 개 등이 그렇다. 해마다 4월말이면 의견공원에서 오수의견제가 열리고 있는 등 오수는 애견가들이 즐겨 찾아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 개의 문양이 선명한 오수의견비
‘오수(獒樹)’의 지명이 전해주듯 임실 오수는 충심있는 개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본래 오수 의견비 이야기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고려 악부의 견분곡과 보한집의 의견비에서 그 근거를 찾게 됐다. 지금도 오수리 시장내 원동산공원에는 의견비(전북 민속문화재 제1호, 지정일 1972년 12월 2일)가 서 있어 주인을 위해 죽어간 개의 충절을 위로하고 있다.

‘옛날 통일신라시대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를 매우 사랑하여 어딜 가든지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집에 가는 도중 그만 길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그 곳에 산불이 나서 그 불길이 주인 근처까지 오게 되자 급해진 개가 주인을 깨우려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개는 할 수 없이 냇가에 들어가 온몸에 물을 묻혀 주인이 자는 주변을 수백번 적시기 시작, 지쳐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개의 충성심에 감탄한 나머지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두었다. 그것이 나무로 살아나 자라나 이 나무를 ‘오수’라 이름 붙이고, 마을 이름도 오수라 불렀다.

후에 동네 사람들이 개의 충성을 대대로 알리기 위해 의견비를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고, 현재의 것은 195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같은 뜻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1992년 면의 명칭도 둔남면에서 오수면으로 바꾸었으며, 1994년 춘향도로 국도변에 김개인과 의견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주인을 구하고 의롭게 죽어간 개가 발자국을 남기고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오수의견비. 그동안 비의 마모가 극심하여 몇글자 외에는 판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마치 글씨가 없는 백비(白碑)처럼 인식되어 임실군지 등 각종 자료집에 소개되고 알려져 왔었다.

2003년 4월 의견문화제를 앞두고 전라금석문연구회 김진돈회장과 이용엽 고문이 앞, 뒤면을 탁본, 앞면에는 마치 개가 뒤집어져 있는 문양을 찾아내면서 예원예술대학교 전북역사문화연구소에서 학술조사를 실시, 여러 가지 결과물이 나왔다.

전면에는 개의 문양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있고, 후면에는 비를 세운 사람들의 기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고려시대 또는 그 전대에 서사된 고식의 서법으로 보았으며, 서체는 육조체로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사용된 서체라는 결론을 냈다. 뒷면에는 대시주 김방질동(大施主 金方叱同), 금물대시주 김여산(金物大施主 金如山) 등 7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유일하게 의견비로 인식될만한 앞면에 있는 문양은 인위적으로 조각되어진 것이 아닌, 넓적한 평면의 돌에 철분으로 인해 마모가 덜된 부분이 개의 형상을 닮아 이를 석비의 형태로 다듬어 의로운 개를 기리는 석비로 세운 것이라는 추정되는 견해가 많다. 탁본에서 드러난 오수개는 우선 귀는 서 있지 않다. 덩치는 좀 큰 편. ‘그렇지 않겠느냐. 개가 몸에 물을 묻혀와 불을 끌 수 있으려면 털이 좀 길었을 것 아니겠냐. 몸집도 좀 있어야 했을 것 아니겠냐….’

앞으로 의견비에 대해 더욱 연구하고 규명해야 할 문제와 여러 가지 견해들이 함께 하지만 한 가지 분명 한 것은 의견비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과 상징성과 문화적 가치가 세계속에 자랑하여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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