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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5일 목요일

지리산펜션;지리산 산마을-구례 영암촌마을










구례 영암촌마을

전쟁보다 슬픈 기억 문수골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구례 최고의 명당 토지면 오미리에서 지리산 품속으로 차를 돌려 닿는 마을이 ‘문수리’인데, 저수지 위쪽의 상죽(웃대내)•중대(영암촌)•불당•밤재 마을을 모두 합쳐 문수리라 부른다.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온 김해김씨가 밤재에 정착 및 개척한 후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문수리란 이름은 ‘문수보살이 문수암(현 문수사)에서 수년간 수도한 결과 성불하였다’ 혹은 ‘문수봉 골짜기 동네’라는 뜻이다. ‘문수’는 ‘문수보살’이란 불교 용어에서 나온 것으로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를 보좌해 왼쪽에서 지혜를 주관한다. 신선불이라고도 하며 지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문수리의 작은 마을들
문수리의 마을들은 크지 않다. 19번 국도 섬진강 옆 구만들에서 출발해 지리산 노고단(1507m) 쪽으로 깊이 스며드는데, 머리맡과 왼편에 노고단을, 오른쪽인 동쪽엔 왕시루봉(1212m)을 두고 있어 구례에서도 산중의 산마을이 된다.
문수리에서도 노고단 쪽으로 가깝게 방향을 튼 밤재는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서 그러한 지명을 얻었다. 불당은 사찰터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되었고,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해서 영암촌(문수리 중간쯤에 있는데다 대나무가 많아서 행정지명은 중대)이 되었으며, 오미리에 있는 하죽, 내죽의 윗동네여서 웃대내(상죽)이란 마을 이름들이 붙었다.
구례군(www.gurye.net) 자료에 따르면 불당마을 주민들이 수호신처럼 받드는 노거수에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문수리에 들렀다가 주위경관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용치의 맑은 물에 속세의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세심’이란 글귀를 새겼다는 전설이 전한다. 용의 복부 형태를 띤 용치에선 가물 때 기우제를 드렸다.
밤재와 불당 사이엔 집채만한 ‘뒤주암(두지바위)’이 있는데, 한때 이 뒤주암 안쪽 골짜기에 숨어들던 사람들은 이 바위를 청학동 석문으로 여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1913년 3월 11일 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져 이곳 운세가 다했다고 믿는다고.
1789년 영조 때 기록인 <호구총수>에는 이미 문수동&#8226;중대&#8226;중산리 동네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일제 초기에 밤재와 불당리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암촌 사람들은 위에서 설명했듯 영암의 조덕오&#8226;경오 형제가 들어와 살아서 영암촌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유형업의 일기 <기어>에도 1905년께 조씨 형제가 영암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한다. 기록과 구전은 언제나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노고단~왕시루봉~형제봉(912m)을 삼각점으로 생성 된 문수골의 넓이는 약 2660㏊, 따라서 예부터 좁고 긴 이 계곡과 동북서로 막힌 깊고 너른 산자락 때문에 사람이 숨어살기에 적당했는데, 또 그것이 명당으로 꼽히는 오미리 일대와 문수리를 붉게 물들게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보다 더 혹독한 여순사건
해방과 분단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지리산 촌로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지만 특히 명당 인근에 산다는 문수골 사람들에겐 목숨 수십 개도 모자란 괴로운 시기였다. 지리산과 강 건너 백운산이 여순사건 때 소위 빨치산과 경찰 토벌대의 피 비린내 나는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한때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렸던 이 비극적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10.19사건.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 주둔의 국군 14연대가, 같은 해 4월 3일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진압에 투입되는 것에 반발해, 김지회&#8226;홍순석 중위 등 좌익계통 군인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대부분 진압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투항했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도주해 빨치산과 합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 때 구만들을 거쳐 문수골로 숨어든 이들은 당시 경찰 추산 2천여 명, 낮과 밤으로 이념을 달리하며 살아야 했던 문수골 주민들에겐 살아있는 지옥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마을 주민들이 희생된 것은 물론 동네도 급격히 쇠락해간다.
소설 <빨치산의 딸>에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김지회가 이끄는 선발부대는 22일 오후 10시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 문수골에 도착하여 23일 새벽 구례읍을 공격, 점령했다가 즉각 문수골로 철수했다” “토벌대의 공격은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광의면당은 천은사골, 화엄사골, 문수골 등 주로 노고단 근처를 넘나들며 토벌대의 끈질긴 공격을 피해 다녔다” “좌익과 우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급적 직관으로 혹은 쌀 한 되로 좌익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이 좌익이라 하여 처형, 투옥 당하거나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구례군 토지면 주민들은 1948년 10.19사건부터 약 7년의 세월을 전쟁 속에 보낸 셈이다.
다시 이념이 갈리고 전쟁이 난다면 그때 또 지리산은 반란군을 품어줄 은신처가 될 것이지, 그래서 또 이 산은 그들을 잡아내려는 토벌대의 총성과 총성 속에 쓰러져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로 물이 들 것인지, 이제 문수골은 과거의 일 따위는 잊은 것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청명하다.
문수리 가운데 마을, 영암촌
19번 국도에서 전통가옥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를 옆에 끼고 문수사 이정표를 따라 도로를 들어선다. 저수지 건너편에 ‘옛 애인의 집’이란 시집으로 유명한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집이 있다. 그의 시집 마지막 장은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며 끝을 맺지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상처를 보듬느라 지리산을 찾고 있다.
문수사로 이어지던 도로 우측으로 ‘영암촌’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기 전 조금 더 직진하면 폐교된 문수초등학교를 보수한 ‘지리산 산간학교(061-781-9779)’가 보이고, 그 앞에서 내려다보는 영암촌의 모습이 제법 아름답다. 남해 가촌마을만큼은 아니지만 영암촌 비탈에도 손바닥만한 다랭이논들이 빼곡히 박혔다. 자연학습장과 가족캠프, 각종 단체 모임과 연수를 겸한다는 지리산 산간학교는 주인의 출타로 문이 닫혔다. 걸음을 되돌려 영암촌으로 내려선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기도 도량. 마음을 비우고 기도를 하는 곳일 텐데 입구에 걸린 문구에 들어설 마음이 들지 않는다. ‘CC TV 작동 중, 개조심, 책임 못 짐’. 기도 도량 입구를 지나면 ‘문수골 계곡이 토지면 상수원이니 깨끗하게 써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여름이면 피서 인파로 몸살을 앓지만 다행히 자발적인 쓰레기 수거와 군에서 파견 된 인력으로 동네 주민들은 큰 불편이 없다고 한다. 늦가을에도 계곡을 잇는 다리 아래에선 지글대는 삼겹살 내음이 솟구친다.
영암촌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계시다는 조삼남(86세) 할머니께 할아버지 소식을 묻자 “벌써 콩 팔러 갔부렀어.” 농담을 하신다. 이미 오래 전 먼저 세상을 뜨셨다는 뜻이다.
여지껏 살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짤짤 아팠샀진 않어. 하긴 죽어봐야 알지.”
아직까진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단 조 할머니는 타지에선 데려갈 총각이 없어 고향인 이 마을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너스레시다. 한때는 35가구쯤 되었던 마을이 10.19 여순사건 때 많이 사라졌다며,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휴, 한숨을 저절로 흘리신다.
“14연대 반란군이 먼저 들어오고 그 후에 군인들이 들어왔지. 바위 틈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붙였응께. 대신 전쟁 땐 큰 싸움이 없었어”
성함을 묻는 내게도 “왜, 잡아갈라꼬?” 슬며시 경계를 하신다. 3년째 따님 박봉엽씨와 살고 있어 그럭저럭 적적함은 덜하다. 마당의 흰개 복실이는 두 모녀의 오래 된 친구다. 차소리만 듣고도 뉘집 손님인지 알아챌 정도라고. 조 할머니의 말씀처럼 ‘사람도 쌨고, 차도 쌘’ 요즘에도 고향의 묵은 집을 떠나지 못하는 그이의 깊은 주름에 가을 햇살이 한가득이다.
‘타관도 고향’임을 믿고 영암촌으로 들어온 황창옥(63세)&#8226;신연남(63세) 동갑내기 부부는 조 할머니와 이웃이다. 고향인 전남 담양에서 서울과 부산을 거쳐 20년 전쯤 부모님이 계시는 영암촌으로 들어왔다고. 어둑한 방안엔 외손자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딸만 넷을 둔 딸부잣집이다.
밤&#8226;한봉(토종꿀)&#8226;고로쇠 수액 체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사실 큰돈이 될 만큼은 아니다. 더구나 한 달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올 밤농사는 예년보다 시원치 않다. 크기도 잘고, 그에 따라 밤금도 없다.
“물 좋고 산도 좋지만 노인들은 불편하지요. 버스가 없어서 택시를 타야 하거든. 노인들이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마을 주민이라고 택시비를 적게 받지만 그래도 병원 한번 다녀오려면 왕복 차비만 1만6천원이예요. 병원비보다 택시비가 더 비싼께.”
그나마 젊은이에 속하는 황창옥씨는 영암촌 반장이다. 상죽이 1반, 중대인 영암촌이 2반, 불당은 3반, 밤재는 4반, 이렇게 4반이 모여 문수리가 된다. 몇 해 전만 해도 다랭이논에 논농사도 지었고, 기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소가 밭을 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이 동네 텃밭쯤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추석 전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방사한 반달가슴곰이 내려와 생포되기도 했다.
“토끼가 나타나도 놀라는데, 그 곰이 통째로 서서 한봉통을 안고 가면 놀라지 안 놀라겄소. 관리공단 곰팀에 전화를 걸면 보험회사에서 확인을 하고 보상을 하지요. 멧돼지는 말할 것도 없고 곰들한테 많이 당합니다.”
실제 문수리엔 지리산국립공원이 방사한 곰들의 거점지가 있다. 문수리에서 야생 적응 훈련을 하고 방사되거나, 야생 적응에 실패한 곰들이 이 문수리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도로 끝에 자리한 문수사에는 불자가 방생했다는 곰을 붉은 철창에 넣어두고 키울 정도. 이래저래 산이 깊긴 깊은 모양이다.
현재 영암촌은 약 10여 가구. 노인들이 대부분인 건 물론 남자도 황창옥씨를 포함 두 사람뿐이다. 동네 곳곳에 멋지게 들어선 집들은 예상대로 외지인들의 별장. 여름에나 가끔 왔다 갈 뿐 평상시엔 문이 굳게 잠긴다. 볏짚 얹었던 지붕을 새마을운동 때 스레트로 바꿨을 뿐 여전히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생활하는 영암촌 반장님 황창옥씨 집과는 대조적이다.
번창하던 마을이 주민들 의지완 상관없이 피바다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 마을에 다시 집이 들어서고 사람이 드나드는 건 차라리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봄이면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 꽃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모여 들고, 여름엔 문수골 계곡을 찾아든 피서 인파로 북적이고, 가을엔 밤과 감을 수확하는 손길로 바쁘고, 겨울에야 조금 한가해지는 작은 산골마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선 노고단 중계탑 너머로 하루해가 또 저물고 있었다.
전남 구례군 문수리 영암촌 가는 길 전남 구례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www.nambuterminal.co.kr)에서 아침 9시 10분 첫차부터 저녁 6시 30분 막차까지 하루 6대의 버스가 운행하며 4시간 걸린다. 요금은 21,800원. 용산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탔을 경우 구례구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무궁화호의 경우 5시간 걸리며 20,400원이다. 부산 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도 구례로 가는 버스가 있다. 배차 간격 포함 3시간 남짓 소요된다. 19번 국도를 지나는 군내버스는 있지만 문수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없다. 구례읍에서 영암촌까지 택시비는 1만원 안쪽.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나, 대진고속도로 장수IC, 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전주~순천간 4차선 산업도로로 들어서 구례로 진입한다. 남해고속도로는 하동IC를 경유해 구례로 갈 수 있다.

지리산펜션:지리산 대호펜션  063)625-4051,010-9553-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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