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암을 처음 가게 된 것은 지리산 아랫동네가 산수유꽃으로 노랗게 물들던 지난 봄날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을 간다는 지인의 얘기에 좌우지간 따라붙은 여행길이었다. 지리산 둘레에 드는, 무량한 햇볕 같은 그 지복을 나는 놓칠 수 없었다. 둘레길을 걸은 곳이 마천이어서 해질 무렵, 근처에 있는 금대암을 들르게 되었다.
정상 부근 산비탈 아늑한 곳
산속 암자 삽상한 기운 받으며
600년 넘는 세월 자리 지켜
'지리방장제일금대'라는 길가 표지석에서부터 자동차는 산길을 꼬불꼬불 가파르게 올랐다. 거의 산 정상 부근이겠다 싶은 곳에 암자는 고즈넉하게 있었다. 이런 깊은 산 속 암자는 한나절이 걸리도록 걸어서 올라와야 하는 건데…. 얼마나 남았을까, 반은 왔나, 그러면서 헉헉거리는 숨과 지친 몸을 내려놓아야 하는 건데, 차를 타고 너무 간단하고 편한 몸 상태로 닿은 것이 고요한 절집의 침입자 같았다.
금대산 정상 부근 산비탈인데도 암자가 앉은 곳은 바람소리 잠잠해지는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부처가 앉은 곳'의 뜻을 가진 '금대'라는 이름이 걸맞아 보였다. 아담한 대웅전과 금대선원, 나한전으로 되어있는 절집의 단출한 모양은 금대산 줄기가 흘러가는 길에 조금의 방해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서게 된 금대암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산 속 절집의 삽상한 기운에 젖어들며 대웅전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달려가는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지리산 영봉줄기가 바로 눈앞에서 마주 보고 있지 않은가. 천왕봉과 중봉, 하봉, 제석봉, 촛대봉…. 아랫동네는 꽃놀이를 하는 봄인데 지리산 봉우리들은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흰눈에 덮인 능선과 계곡으로 뻗어내리는 산주름에서 지리산 영험한 기운이 눈가루처럼 날렸다.
지리산 봉우리들을 놀라워하다가 보니 다시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수평으로 이어지는 영봉줄기를 가슴에 두르고 수직으로 솟구친 나무. 하늘을 향한 우람한 기둥이었다. 우주목이라 할 만한 전나무, '이 땅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가장 큰 전나무'를 이렇게 시부적하게, 하지만 운좋게 나는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금대암 전나무는 조선 성종 때 문신 김일손이 지리산을 기행하며 쓴 글 <유두류록>에도 나오는 나무다. 1489년 당시에 금대암 마당에서 큰 전나무를 보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지금은 6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다. 그리고 신라 태종무열왕 때 행우조사가 창건한 금대암은 이미 '최고의 지리산 전망대'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에는 고려 때 진각국사가 눈이 이마까지 쌓여도 꼼짝 않고 앉아 수행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진각국사가 눈 속에서 묵묵히 좌선하던 그날, 마주 앉은 지리산 능선과 골짜기도 하얗게, 선 채로 눈에 덮인 전나무도 함께 용맹정진 했을 터이다. 마당 앞에서 산죽들 사이로 전나무 앞에까지 가는 길이 가파르게 나있었다.
지리산 영봉에서 받는 호연지기나 나무에게서 받는 충일한 느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글을 얼마 전에 읽었다. 최근 아프리카에서는 약 440만년 전 생존했던 인간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한다. 이 최고 오래된 인류 조상의 별명을 '아르디'라고 지어준 과학자들은 지구에서의 인간의 역사를 적어도 700만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가늠하기 어려운 그 오랜 세월을 인류는 대부분 숲에서 수렵과 채취를 통해 살아왔고 인류가 숲에서 나와 농경과 축산을 통해 공동체 생활을 해온 것은 1만년에서 5천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는 흙길을 하루에 한 번도 밟아보기 어려운 산업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우리 몸과 마음 안에는 숲생활에 맞도록 설계된 오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숲을 떠난 인간의 몸과 마음은 유전설계와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서 늘 불안을 겪는다. 우리가 숲과 나무 옆에서 부질없이 시달렸던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그래서 편안해지고 느린 걸음을 걷게 되는 것도 인류의 근원이 숲에 닿아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금대암 전나무를 다시 찾은 것은 지난 12월, 지리산 능선에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날이 맑아서 지리산 깊은 골짜기 산주름들을 지도의 실선처럼 뚜렷하게 짚어가며 그립던 이름을 불러볼 수 있었다.
새해 들어 대설주의보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금대암에서 마주 보는 지리산 봉우리들도 하얗게 눈으로 덮였겠다. 꼼짝 않고 눈을 맞으며 진각국사처럼 선정에 든 전나무 모습도 보고 싶다. 숲의 유전자가 나를 끌어당기는 중이다.
지리산펜션:지리산 대호펜션 063)625-4051,010-9553--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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