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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5일 목요일

지리산펜션:지리산산마을-하동화랑수마을


2012/04/02 12:02 수정 삭제






찻잎 따는 손길마다 쌉싸래한 향기

어느 여기자의 일기 한 토막
지리산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 전부터였지만 그렇다고 정작 내려가 살게 될 거라곤 스스로도 믿지 못했다. 현실성 결여, 단지 희망사항, 언젠가 그저, 라고 막연히 미뤄뒀던 꿈,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고, 용기가 주어진 순간, 서울을 떠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능한 하동군으로 가고 싶었다. 하동은 축복 받은 곳이다. 지리산과 섬진강과 야생차와 바다….
소설 <토지>와 <역마>, 각종 드라마의 배경이 되어주는 풍경, 매년 4월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진 십리벚꽃길의 아득한 절경, 지리산 계곡을 타고 내려와 화개천으로 모여든 맑은 물줄기, 천년 고찰 쌍계사(국사암)와 칠불사, 대성골&#8226;단천골&#8226;선유동&#8226;빗점골 등의 무수한 등산로, 계곡 비탈의 앙칼진 바위 틈마다 솟은 야생차나무, 소박한 찻집들, 은어와 재첩과 참게와 산채가 어우러진 땅, 화개.
화랑수마을과 인연을 맺다
화랑수(花浪水)마을은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면소재지에서 약 7㎞ 떨어져있다. 화개의 중심 도로는 좁은 호리병처럼 15㎞를 내달리는데, 위치상으론 19번 국도 화개 진입로에서 도로 마지막 지점인 의신까지의 딱 절반쯤 되겠다. <화개면지>에 따르면 화랑수란 이름은 칠불사 가기 전 범왕리 연동마을의 연꽃에서 유래한다. 연동의 연꽃들이 채 피기도 전에 늦장마라도 지면, 연꽃들이 구비구비 흘러 화랑수 앞 계곡 소에서 원을 그리며 꽃이랑을 이루어 흘러갔다고. 그 광경이 아름다워 ‘화랑수’라 했다는 것이다.
계곡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화랑수마을의 구름다리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됐다. 지금은 시멘트로 견고하게 만든 아치형 다리가 그 임무를 대신하지만 이 다리가 생긴 2002년 이전에는 구름다리로 통하는 흔들다리가 화랑수와 도로변 마을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소통의 끈이었다. 마치 네팔의 산간 마을처럼.
2003년 1월, 지리산으로 내려와 살 집을 찾기 위해 주말마다 화개로 달려갔던 내게 마음에 정확히 들어앉는 집은 없었다. 마당이 넓으면 식수원이 없었고, 전망이 좋으면 수리할 곳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몇 차례, 한 번 내려올 때마다 서너 곳씩 살 곳을 알아보다 지금의 집을 만났다. 첫인상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 해 겨울,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마당이며, 창호지가 덧발라진 방문, 어설프게 색칠한 툇마루까지, 손을 댈 곳도 별로 없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곳이었다.
“100% 맘에 드는 곳을 얻긴 힘들 테니 살면서 차근차근 찾아보라”는 동네 어르신의 권유에 따라 나는 덜컥, 조그만 집 하나를 계약한다. 도시말로 하자면 보증금 없는, 계약서도 없는, 월세 살림살이였다.
이사를 오던 2월 3일, 밤새 많은 눈이 내렸다. 올 겨울 가장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라고, 환영의 의미라며 치켜 세우던 현지 이웃들.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큰소리 치고 내려와 도망치듯 상경하면 안될 텐데, 마당 위로 차분히 쌓이는 함박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화랑수에서의 낯선 첫날 밤을 뒤척뒤척 보냈었나 보다.
화랑수 절반 이상의 집들은 입식부엌에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지만, 나의 집을 포함 몇몇 집들은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현대판 나무꾼이 되어 장작을 사고파는 일도 있지만 남원 산림조합에 들러 피죽 한 트럭을 사오는 일도 흔하다. 도끼질 하기 힘든 여자들에겐 오히려 얇은 피죽이 수월할 때가 많다. 마당 가득 쌓인 피죽을 서너 토막으로 나누어 부엌과 마루 밑에 차곡히 쌓아두고, 추위가 가실 때까지 저녁마다 불을 지피는 일.
가끔은 숯불에 고등어도, 삼겹살도 구워 먹으며, 그 앞에 앉아 책도 읽고, 떠난 애인의 흔적을 태우기도 하는, 아궁이 속 장작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잡념조차도 무색할 만큼 경건할 때가 있다. 뽀글뽀글 물이 끓으면 묵직한 가마솥 뚜껑을 열고 물을 퍼낸다. 세숫물로 쓰일 귀한 온수다.
흙으로 지어진 집이라고 해서 고급 황토집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지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수십 년 전, 그냥 시골동네의 평범한 살림집 정도. 요즘 같은 계절엔 앞뒤로 지리산 숲속에서 뻐꾹뻐꾹 뻐꾸기, 홀딱벗고를 외쳐대는 검은등뻐꾸기, 휘휘- 등골 오싹한 한밤중 검은지빠귀, 소쩍소쩍 구슬픈 소쩍새, 낯익은 까치까지,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새소리로 잠잠할 겨를이 없다. 지붕 위로 톡톡 떨어지는 설익은 감 열매, 재를 뿌려 악취를 막는 재래식 화장실, 집게가 매력적인 하늘소, “꺄악!” 기겁을 하게 만든 지네까지.
시골에선 소리에 민감하다. 소리가 다양하고 소리가 명확하다. 시골의 봄바람 속엔 많은 소리들이 담겨있다. 뜨문뜨문 처마끝 풍경 소리, 보글보글 찻물 끓는 소리, 파란하늘 구름 흐르는 소리, 어두운 밤 별빛 떠나는 소리, 바람에 부닥치는 나뭇잎 소리, 간지러운 계곡물 소리, 삐그덕 낡은 문짝 우는 소리, 바람이 벅벅 창호지 긁는 소리, 집배원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 뒷집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 무엇보다 저 산새소리들.
가끔은 분위기 좋은 생맥주집도, 종로5가의 닭칼국수도, 대한극장의 시원한 스크린도 아스라이 떠오르지만, 오가는 손님들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마음껏 웃어보는 화랑수 속 일상은 도심의 그것과 쉽게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화랑수의 사계

화개 대다수 집들이 그러하겠지만 화랑수의 봄은 여느 동네보다도 바쁘다. 열 가구 중 객지에서 들어온 나를 제외하곤 모두 차 농사, 혹은 차를 만드는 분들이기 때문. 공교롭게도 서울에서 내려온 여자분 둘이 더 있는데 그들 역시 차와 효소와 약초 재배 등으로 생계를 꾸린다.
찻잎을 따는 일손이 부족해 인근 곡성과 광양에서까지 좁은 화랑수로 유입됐고, 평소엔 도시 대처로 나가있던 자녀들도 회귀하는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물망태에 넣어온 찻잎에선 방금 딴 싱그러움이 묻어났고, 저녁이면 가마솥에 찻잎을 덖느라 고소한 냄새가 담장을 넘어왔다. 차 맛을 보며 좌우로 흔들리던 고개가 끄덕끄덕 긍정의 뜻을 표할 때면 화랑수표 차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마을을 떠났다.
화개에선 소위 녹차가 흔하다. 티백은 최하품이라고 아예 쳐주지도 않는다. 집집마다 커피 내놓듯 이곳에선 차, 그것도 우전이니 세작이니, 도시에선 고가에 팔리는 차들을 일상처럼 마시며 생활한다. 허리가 휘도록 고단한 봄, 손톱 끝에 시커먼 찻물이 베고, 하루에도 수십 잔씩 차를 넘기며 맛보느라 쓰린 속, 그래도 서울 인사동이나 유명 사찰로 차가 팔려갈 땐 출가 시키는 자식 보듯 흐뭇하게 떠나 보내는 인자한 눈매들이다.



여름의 화랑수는 봄만큼 활기차다. 매실을 수확하고, 매실로 담근 술이나 원액을 담장 밑 장독 안에 소중히 모셔둔다. 섬진강 건너 광양에 이름값을 넘겨주긴 했지만 섬진강 매실의 원조는 하동. 화랑수도 예외는 아니어서 철 지난 차밭마다 초록의 단단한 매실이 주렁주렁 초여름 햇살에 반짝인다. 매실 수확이 끝나고, 장마마저 물러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화랑수 다리 밑은 도시에서 몰려든 피서 인파로 가득하다.



지리산 남쪽 계곡들의 차가운 물이 화개천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발목을 겨우 적실 듯한 얕은 물도 어른의 키를 덮을 만큼 깊이를 높인다. 가슴까지 철렁대는 물속에서도 발가락 끝이 보이는 깨끗한 물. 아이들은 얕은 곳에서, 어른은 깊은 곳에서, 자갈밭 위에 아슬아슬 텐트를 치고, 다리 밑 평상에 눕기도 하며, 도로는 주차장이 되고, 마을마다 민박집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곳. 여름 한철을 위해 집집마다 민박을 하지만 주인과 손님으로 매정히 그어진 경계선은 없다. 도시에 나간 손주를 맞이하듯 옛집들에선 정겨움이 넘쳐난다.



그에 비해 가을과 겨울은 조금 한적하다. 간간이 감이며 밤을 수확하는 집들과 통장 잔고처럼 장작을 쌓아 올린 집들만 늘어나는 계절. 시간이 소리 없이 흐르고, 다시 봄이 오면 마을은 기지개를 켜듯 새로운 1년을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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