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만복사터]
기린산을 뒤로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인 만복사는 남원에서 가장 큰 절임과 동시에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
이 절의 창건 연대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재위때(1046∼1083)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전(世傳)에는 신라때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세워졌다는 얘기도 없지는 않다. 고려시대 크게 번성했으나, 임진란 때 수난을 당하였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 군사와 왜군간에 남원성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화를 입은 것이다. 당시 왜군은 성밖에서 남원부성을 지키는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 공격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숙종 4년(1678)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해 왔고, 토착 승려에 의해 사지가 지켜졌다. 이후 300여년 동안 폐사로 있다가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복원되었다.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주임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당 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음을 확인했다. 고려시대의 가람 배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터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만복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의 왼쪽 언덕 아래 세워져 있는데, 원 위치로 추정되며 원래 상태대로 두 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표면에는 조각이 없으며,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사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다가 외면과 접하는 모를 죽여 그 부분만을 둥글게 하였다. 현재 아랫부분이 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고, 간대(竿臺)나 기단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인상은 주지 않는다. 각 부의 양식이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복사지 석불입상
높이 2m의 석조여래입상으로 보물 제43호이다. 규모가 비교적 클 뿐 아니라 제작시기를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 졌는데, 광배 뒷면에는 손에 정병을 든 약사여래입상이 음각되어 있다. 대퇴부 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움츠린 듯한 양어깨가 좁고 하체도 다소 빈약한 편이다.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쳐진 대의(大衣)는 불신에 꼭 붙어서 몸의 굴곡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옷주름이 다리에서 둘로 갈라지는 이른바 우다야나식(Udyana式)의 착의법으로 표현된 것은 인도 굽타기(Gupta期)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통일 신라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눈과 코는 손상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양손과 발은 결실되었는데, 원래는 각각 따로 만들어 손목과 발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인다. 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입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佛衣)의 양 깃, 넓게 열린 편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노출하고 있지만, 불상규모나 기법 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여진다.
만복사지 석좌
보물 제31호로, 1석으로 조성된 6각형의 연화대좌(蓮華臺座)이며 원 위치에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대(座臺)는 방형 혹은 8각, 원형 등이나 이 석좌는 6각형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 각 면의 우주와 탱주 가장자리에 선조(線條)를 장식한 것이라든가 안상의 안쪽에 귀꽃형 화문을 장식한 수법 등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서, 이 석조대좌의 조성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30호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높이는 5.5m이다. 이 탑은 현재 4층 옥개석이 남아 있으며 기단 구조는 명확하지 않으나 2층 기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층 기단의 갑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만이 노출되어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하에 매몰된 부분은 별석(別石)의 지대석과 기단 면석(面石)이며 각 면석의 중앙에는 탱주(?柱) 하나가 각출되어 있다고 한다. 옥개석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옥개석은 양 전각(轉刻)에 이르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마치 목조건물의 옥개곡선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윗면에는 1단, 아래에는 2단의 받침을 갖추고 있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2층에서 4층에 이르기까지 탑신과 옥개 사이에 별석의 탑신 받침대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신 받침대는 방형의 판석으로 밑에는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상면에는 1단의 탑신 굄을 각출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홍제동 오층석탑·신복사지 삼층석탑 등 고려탑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낙산사 칠층석탑 등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받침대의 출현은 목조탑에서 난간이 탑신을 두르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난간부의 퇴화양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양식은 주로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석인상(石人像)
사지 남쪽 당간지주(幢竿支柱) 옆에 있으며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80년대 발굴시 하체부분이 드러난 바 있으며 주목되었다. 얼굴의 형은 신라석인상(新羅石人像)을 닮고 있으나 그 용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즉, 이를 당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절을 수호해 주는 장상(將像)으로 보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상투가 크며 눈은 튀어나와 위로 치켜 떠올리고 있음에 반해 코와 입의 표현은 부드럽게 하였다. 현재는 복부 이하가 모두 매몰되어 있다.
<만복사 저포기>
살아있는 남자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한문 단편 소설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도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그의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金鰲神話)'에 실려 있다. 국내에는 김집(金集)의 한문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실려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다. 양생은 젊은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탑돌이 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해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樗蒲 : 백제 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다. 내기에서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처녀는 난리 중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귀신 처녀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처녀의 명복을 빌면서 여생을 마쳤다는 이야기이다.《춘향전》이 여자인 춘향이 남자인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사랑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반대로 남자인 양생이 절개를 지키는 이야기로서 함께 남원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춘향전》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지리산펜션:지리산 대호펜션 063)625-4051, 010-9553-5786
기린산을 뒤로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인 만복사는 남원에서 가장 큰 절임과 동시에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
이 절의 창건 연대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재위때(1046∼1083)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전(世傳)에는 신라때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세워졌다는 얘기도 없지는 않다. 고려시대 크게 번성했으나, 임진란 때 수난을 당하였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 군사와 왜군간에 남원성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화를 입은 것이다. 당시 왜군은 성밖에서 남원부성을 지키는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 공격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숙종 4년(1678)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해 왔고, 토착 승려에 의해 사지가 지켜졌다. 이후 300여년 동안 폐사로 있다가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복원되었다.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주임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당 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음을 확인했다. 고려시대의 가람 배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터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만복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의 왼쪽 언덕 아래 세워져 있는데, 원 위치로 추정되며 원래 상태대로 두 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표면에는 조각이 없으며,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사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다가 외면과 접하는 모를 죽여 그 부분만을 둥글게 하였다. 현재 아랫부분이 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고, 간대(竿臺)나 기단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인상은 주지 않는다. 각 부의 양식이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복사지 석불입상
높이 2m의 석조여래입상으로 보물 제43호이다. 규모가 비교적 클 뿐 아니라 제작시기를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 졌는데, 광배 뒷면에는 손에 정병을 든 약사여래입상이 음각되어 있다. 대퇴부 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움츠린 듯한 양어깨가 좁고 하체도 다소 빈약한 편이다.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쳐진 대의(大衣)는 불신에 꼭 붙어서 몸의 굴곡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옷주름이 다리에서 둘로 갈라지는 이른바 우다야나식(Udyana式)의 착의법으로 표현된 것은 인도 굽타기(Gupta期)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통일 신라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눈과 코는 손상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양손과 발은 결실되었는데, 원래는 각각 따로 만들어 손목과 발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인다. 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입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佛衣)의 양 깃, 넓게 열린 편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노출하고 있지만, 불상규모나 기법 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여진다.
만복사지 석좌
보물 제31호로, 1석으로 조성된 6각형의 연화대좌(蓮華臺座)이며 원 위치에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대(座臺)는 방형 혹은 8각, 원형 등이나 이 석좌는 6각형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 각 면의 우주와 탱주 가장자리에 선조(線條)를 장식한 것이라든가 안상의 안쪽에 귀꽃형 화문을 장식한 수법 등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서, 이 석조대좌의 조성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30호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높이는 5.5m이다. 이 탑은 현재 4층 옥개석이 남아 있으며 기단 구조는 명확하지 않으나 2층 기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층 기단의 갑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만이 노출되어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하에 매몰된 부분은 별석(別石)의 지대석과 기단 면석(面石)이며 각 면석의 중앙에는 탱주(?柱) 하나가 각출되어 있다고 한다. 옥개석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옥개석은 양 전각(轉刻)에 이르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마치 목조건물의 옥개곡선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윗면에는 1단, 아래에는 2단의 받침을 갖추고 있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2층에서 4층에 이르기까지 탑신과 옥개 사이에 별석의 탑신 받침대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신 받침대는 방형의 판석으로 밑에는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상면에는 1단의 탑신 굄을 각출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홍제동 오층석탑·신복사지 삼층석탑 등 고려탑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낙산사 칠층석탑 등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받침대의 출현은 목조탑에서 난간이 탑신을 두르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난간부의 퇴화양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양식은 주로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석인상(石人像)
사지 남쪽 당간지주(幢竿支柱) 옆에 있으며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80년대 발굴시 하체부분이 드러난 바 있으며 주목되었다. 얼굴의 형은 신라석인상(新羅石人像)을 닮고 있으나 그 용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즉, 이를 당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절을 수호해 주는 장상(將像)으로 보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상투가 크며 눈은 튀어나와 위로 치켜 떠올리고 있음에 반해 코와 입의 표현은 부드럽게 하였다. 현재는 복부 이하가 모두 매몰되어 있다.
<만복사 저포기>
살아있는 남자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한문 단편 소설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도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그의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金鰲神話)'에 실려 있다. 국내에는 김집(金集)의 한문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실려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다. 양생은 젊은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탑돌이 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해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樗蒲 : 백제 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다. 내기에서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처녀는 난리 중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귀신 처녀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처녀의 명복을 빌면서 여생을 마쳤다는 이야기이다.《춘향전》이 여자인 춘향이 남자인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사랑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반대로 남자인 양생이 절개를 지키는 이야기로서 함께 남원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춘향전》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지리산펜션:지리산 대호펜션 063)625-4051, 010-9553-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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