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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5일 목요일

지리산펜션:황산대첩비,송흥록생가-지리산둘레길 2구간내위치











2구간내에" 소리길"이라는(동편제)스토리있는 구간이며,문화유산이 풍부한 코스.

19세기 판소리 전기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며 판소리의 중시조로서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졌으며,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송흥록이 판소리사에 공헌한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진양조 장단을 완성한 것이며, 두 번째는 산유화조를 도입한 것이다.
산유화조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형이다.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송흥록을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판소리사에 대한 공헌 때문이다.
『조선창극사』에는 송흥록이 그의 매부인 “김성옥에게 진양조를 처음 듣고 다년간 연마하여 그 완성이 극치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송흥록이 진양조를 완성한 데에는 대구감영의 명기였던 맹렬이란 기생과 관련이 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송흥록의 소리에 반하여 같이 살던 맹렬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그를 떠나자 슬픈 마음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진양조였다는 것이다. 안민영이 쓴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송흥록의 집에 가니 맹렬이가 집에 있어서 같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사실인 듯하다.
송흥록은 귀곡성을 잘했는데, 진주 촉석루에서 「춘향가」 중 ‘옥중가’를 부를 때 귀곡성을 내자 촛불이 꺼지며 공중에서 귀신 울음 소리가 나는 듯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810년에 쓰여진 송만재의 「관우희」, 1826년에 쓰여진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관극시」에 송흥록의 이름이 나온다. 『금옥총부』에는 1842년에 안민영이 순창에 내려갔다가 주덕기와 함께 송흥록을 방문하여 신만엽, 김계철, 송계학 등 명창들과 수십 일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송흥록의 활동 무대는 진주, 대구, 서울 등 전국에 걸쳤으며, 송흥록의 집은 당대의 명창들이 모이는 장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흥록은 「변강쇠타령」, 「춘향가」 중 ‘옥중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더늠으로는 『조선창극사』에 단가 한 편이 전한다.

황산대첩비:


1577년(선조 10)작. 높이 4.25m. 이 비는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南應雲)이 하였고,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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